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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조용헌 살롱-이시영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wo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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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두 집안이 있다. 한 집은 12대 300년 동안이나 만석군의 부(富)를 유지했던 경주 최 부잣집이고, 다른 한 집은 조선 후기까지자그마치 10명의 재상을 배출했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白沙公派) 이시영(李始榮·1869~1953) 집안이다. 최 부잣집이 조선의 부를 대표하던 집안이었다면, 이시영 집안은 조선의 귀(貴)를 대표하던 집안이었다. 전자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보여준 집이라면, 후자는 일제 강점기에 명문가로서 귀를 어떻게 지켰나갔는가를 보여주는 집이다.
이시영의 형제는 모두 6형제였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모두 합심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일제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는 통탄이었다.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가 이시영,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다.서울 명동을 떠나면서 처분했던 재산총액은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0억원 정도. 이 돈으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여기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모두 중국에서 죽었고, 이시영만 유일하게 광복 이후 귀국할 수 있었다. 이시영은 17세(188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평안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을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만주로 갔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수많은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으며, 임시정부 법무총장, 광복 후에는 부통령을 지냈다. 그 이시영의 52주기추모식이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다. 한국은 이 집안에 빚을 졌다.

[조선일보 0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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