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한다.

안녕하세요.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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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범재 선생란에 우당선생님의 글이 있어 한편 올립니다.
저의 생각은 임시정부 설립부터 가장 먼저 상해에 도착하셔서 원로로써 의정원 을
지휘하신 것으로 사료되오며 3.1운동에 아주 많이 관여하신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일경의 3.1운동 주모자에 대한
수사가 본격되는 시점에 임시정부를 잠시 떠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많은 가르침을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저의 여식 (Binghamton University 3학년) 이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고국의 문화도 배우고 한국어도 배울 겸 서강대 에서 주최하는 6주 연수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6주 연수가 끝나면 혹은 시간이 허락하면 연수중 이라도 우당 선생님 기념관에
들려 인사 드리게 하고 싶습니다.
범재선생의 직계후손이며 아주 위대한 독립운동을 하신분 이라고 말하여도
아이들은 실감을 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다만 한 두시간 이라도 시간 내셔서
교육 시켜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범재 선생과 동지이며 친구이신 우당 선생님께 인사 드리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되어 부탁 드립니다.어려운 부탁이라고
생각되시면 거절 하셔도 됩니다.
건강하시고 기념회의 무궁한 발전과 좋은 일만 생기시기 바랍니다.
김상철 올림

범재선생 임시정부-3편
아주 조그마한 단체를 설립 하려 하여도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
갑니다. 하물며 정부수립을 하려 하면 모든 것은 천문학적으로 계산 하여야 합니다.

무심히 지나갔고 두리뭉실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광복 60여년이 흘럿지만
범재선생의 위대한 업적은 보물상자 속에 묻혀 빛을 볼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55년전 한국전에 참전하여 산화한 미군의 유해를 지금도 북한에 수 백만불씩
들여서 찾고 있는 미국을 보며 애국심과 나라 사랑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몇일전 북한에서 또 발굴하지 안하겠다고 트집잡았지만…)

범부에 지나지 않는 보통 사람으로 도저히 이해 할수도 없고 그냥 지나가서는
절대 안되는 사항이 있습니다.

무오독립선언(일명 대한 독립선언) 2.8 동경선언 (독립선언) 3.1 운동 (3.1 독립선언)
임시정부수립,파리강화회담, 이것이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하고 영원불멸의 독립운동사
이며 자랑스러운 우리의 투쟁사 입니다.

그런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지나가는 소나 개가 울고 웃을 일이 있습니다.
위에 어느 것 하나 명령권자 주인공이 없습니다.서명자와 공작원과 중견 간부만 있지
배후의 명령권자 주인공이 없습니다.있는줄도 모릅니다.

얼마전 일본에 가짜 유골을 보내서 천하에 조롱거리가 된 북한처럼 외국에서
이런 독립운동사 사실을 안다면 세계토픽으로 웃음거리가 될지 모릅니다.
가짜 독립운동사가 60년동안 진실로 알고 배우고 가르친 사실은 정부와 역사 학자들은
무릎꿇고 국민 앞에 가짜 유골을 시인하고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웃음 거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실을 시인 하지 않는 것이 진정 두려운 것 입니다.

1917년 대동단결을 천명한 범재선생!! 이제 6개 단체로 분산 되어있는
한인단체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을 합니다. 두월생(杜月笙-손문의 심복우인 이며 알선책임자) 중국인의 알선으로 프랑스 조계지역 금신부로 22가에 가옥을 임차하여
임시 의정원을 개원하고 동제사 중견간부와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대동단결의 표현으로
임시정부 수립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초창기 의원명단 1919년 4월
현순,손정도,신익희 조성환 이광 이광수 최근우 백남칠 조소앙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령 조완구 신채호 김철 선우혁 한진교 태희창 신철 이영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호 여운형 여운홍 현창운 김동삼.(29명)

거의 100% 범재선생과 친분관계 혹은 동제사 요원(신한청년당 포함) 이며
신성(신규식 선생) 이 빠진것과 50대 장년층과 20대 청년들이 어우러저 있습니다.
이후 700-1000명 가까운 인원이 상해로 몰려오며 같은시점에 3.1 운동 지휘 본부에 대한
일경의 압박은 시작 되었습니다.

3.1운동에 관여하지 않은 자유스러운 미주의 투사들도 치외법권 지역으로 오기 시작 하였고
5월에 여운홍과 김탕을 여운형과 범재선생 이름으로 파리로 또 거기서 미국으로
보내는 연막전술을 쓰며 일본의 수사가 본격되는 5월 의정원 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과 몽양선생도 의정원에서 이름이 빠집니다.

몽양선생과 소장파들은 몇 개월후 슬그머니 다시 제자리로 들어오지만 범재선생은
얼굴도 내밀수 없습니다.제 생각이지만 우당선생 역시 이 시점에 자취를 감춘 느낌
이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임정과 임정원에는 3.1운동에 일경으로부터 자유스럽고 막강한 자금력으로 상해파를 누르고 미주파가 장악 하기 시작 합니다. 어쩌면 3.1운동과 파리회의 까지가
혼신의 힘을 사용한 범재선생의 자금력의 한계점인지도 모릅니다.
동제사 요원들에게 자금을 제공 못하면 동제사는 공중 분해되며 어쩌면 막중한
책임을 공중분해 하지 않고 임정에 넘긴 듯 합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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