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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일보 기사-우당 이회영과 일농 윤복영 난 부채의 인연
작성자   
woodang
[ 2009-08-12 17:20:04 ]    
우당, 일농 집에 숨어 독립운동 중(中)돌아가며 부채 선물
일농 아들 윤형섭씨, 90년만에 우당기념관에 기증키로

이회영 선생님이 3.1운동 직전에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신 뒤, 인편으로 이 부채를 제 아버님께 보내오셨다고 들었어요. 가보처럼 소중하게 물려온 것이지만 두 분이 맺은 아름다운 인연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이제 우당기념관에 돌려 드리기로 했습니다.(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의 손자 이종찬(73) 전 국정원장과 우당 제자인 일농 윤복영 (尹福榮 1895~1956)의 아들 윤형섭(76) 전 교육부 장관(연세대 명예교수)이 10일 낮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난초 그림 부채 한 점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1910년 12월 중국으로 망명했던 우당이 1913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차 국내에 잠입했을 때, 제자인 일농의 집에서 신세 진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훗날 그려준 부채였다. 우당은 일제의 눈을 피해 몇 달 동안 일농의 집 별실 병풍 뒤에 숨어 지냈다.

석파란(石坡蘭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의 대가였던 우당은 부채에 난을 친 뒤, 蘭以證交(난이증교)라는 글씨를 남겼다. 이 난초로 사귐의 증표를 삼는다는 뜻이다. 이종찬 전 원장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 독립운동을 위한 임무를 계속해달라는 당부였다고 말했다. 우당은 한말(韓末)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였던 신민회 설립을 주도했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의 일가 40여명을 이끌고 간도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동생인 성재 이시영은 한말 외부 교섭국장과 평안남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재무총장을 역임했고,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이 됐다. 우당의 아버지 이유승이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그의 집안은 11대조(祖) 백사 이항복 이래 10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다. 우당 집안은 망명을 앞두고 전 재산을 처분해 40만냥(지금 돈 수백억원)을 마련했지만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에 쏟아 붓는 바람에 가족들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당을 비롯한 5형제는 중국에서 병들어 죽거나 옥사했고,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우당 집안은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일농은 상동교회 부설 청년학원에 다니면서 교사였던 우당에게서 민족정신을 배웠고, 조선어강습소에서 주시경에게 우리말을 배웠다. 그는 협성학교 교사로 교육운동에 종사했고,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참여했다.

우당의 아내 이은숙이 쓴 수기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에 따르면, 우당이 망명할 때 일농도 함께 가겠다고 했으나 그대는 국내에서 나의 앞을 도와달라는 우당의 부탁을 받고 남았다고 한다. 우당기념관의 윤복영 사진에는 우당의 명을 받아 협성학교, 조선어학회, 기독청년회를 거점으로 국내 지하운동에 헌신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윤형섭 전 장관은 일제 말 아버지는 저와 형을 적선동 설렁탕집에 자주 보냈는데 해방 후 그 식당이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독립운동 자금 공급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우당과 일농의 인연은 우당이 대련 감옥에서 옥사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종찬 전 원장의 호적등본 주소는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 윤형섭 전 장관이 살던 집이다. 1925년 독립운동 자금 모집차 귀국한 이은숙은 일농 집에 머물며 중국에 있던 우당 일가의 호적을 이곳에 올려놓았다. 윤형섭 전 장관은 아래채에 계시던 분을 몹시 따랐는데, 해방 뒤에야 그분이 우당의 아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이종찬 전 원장은 할머니는 협성학교 댁에 우리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했다.

윤형섭 전 장관은 오는 11월 17일 선친 기일에 맞춰, 우당의 부채를 우당기념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우당 기일도 11월 17일로 같은 날이다. 이종찬 전 원장은 할아버지의 난 그림은 몇 점 있지만, 글씨가 담긴 그림은 보지 못했다면서 할아버지가 90년 전에 독립운동의 뜻을 담아 그린 부채가 돌아오게 돼 가슴이 뛴다고 했다.

2009-8-12(수) 김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