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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산홍엽으로 짙게 물든 깊어가는 가을날,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순국 75주기를 추도하는 이 자리에서 추념의 말씀을 올리게 되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아직도 우당 선생이 평생을 바쳐 꿈꾼 세상을 지금까지 후대들이 이룩하지 못한 송구함 때문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의 모든 것을 바쳤는데, 조국은 선생의 위업에 무엇으로 보답했는가 하는, 송구스러운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당 선생이 꿈꾼 세상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진행형으로 우리 후대가 계속해서 기리고 이어가야 할 귀중한 민족의 과제이자 좌표라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다 시피 우당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건영·석영·철영·시영·호영 등 여섯 분 형제들은 한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이렇게 선생의 일가가 사회 지도층으로서 민족적 책임을 다하여 한국근대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적 존재가 된 데에는, 바로 선각자이신 우당 선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당 선생은 1867년 서울에서 삼한 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던 명문대가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부친 이유승 선생은 조선왕조의 명신 백사 이항복의 후예로 한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모친이신 동래 정씨 또한 한말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순조의 따님이었습니다. 이항복부터 시작해서 8대 동안 계속해서 판서를 배출하고, 8명의 판서 가운데 6명은 영의정을 지냈고 1명은 좌의정을 지냈습니다. 신분질서가 강고하던 봉건사회에서 선생이 벼슬에 뜻을 두었다면,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당 선생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에 연연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당 선생의 위대한 점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타파하여 근대사회로 개화하는 데 앞장섰고,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극복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자신은 물론 형제들의 헌신을 요구하였습니다. 개인과 가문의 부귀영달을 버리고, 겨레와 조국을 위한 영원한 삶을 선택한 자기 희생정신이야말로 우당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당 선생이 이렇게 역사적인 삶을 선택한 근저에는 명문대가로서의 자부심과 대대로 숭상해온 가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의 집안이나 외가에 전래하던 전통학문은 지행합일의 실천 논리와 현실개혁의 의지가 넘쳐나던 양명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당 선생은 일찍부터 현실개혁을 통한 조국 근대화의 욕구가 컸고, 그런 의욕은 평생 동지들인 이상설이나 여준 등과 교류하면서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말 일제의 침략을 목도하면서 반외세 자주화의 의지 또한 굳어졌습니다.

  명문대가의 자제로는 드물게 우당 선생이 상동교회에 들어가 조국 개화의 튼튼한 동량을 양성하기 위해 상동청년학원을 세우고 그 원감으로 활동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선생께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과감하게 구국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상설 등 동지들과 을사늑약 파기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나인영·기산도 등을 지원하여 을사 5적의 처단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1907년에는 전덕기·양기탁·이동녕 등과 함께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인 신민회를 비밀리에 결성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또 헤이그특사 파견의 막후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세계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온 인류를 향해 동양평화는 물론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목숨 바쳐 전파한 헤이그 특사들의 절규도 선생이 있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헤이그특사 파견 100주년과 신민회 결성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그래서 더욱 우당 선생에 대한 추모의 정이 간절한 가 봅니다.

  조상위토 팔아 독립군기지 만들어

  우당 선생이 또 하나 빛나는 업적은 일제의 한국 병탄을 예견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만주 땅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려는 계획을 세워 추진한 사실입니다. 선생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는데 드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형제들을 설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선생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병탄 직후 전 재산을 정리하여 이주 자금을 마련하고 가솔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우당선생 일가가 살다가 망명길에 나서면서 판 집과 땅은 현재 서울 YWCA 건물과 그 뒷편 그리고 명동성당 앞부분 일대였습니다. 당시 마련한 현금이 40만원,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조상에게 제사 지내기 위한 용도의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습니다. 나라 잃은 망국노에게 조상의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당 선생이 살던 집은 공교롭게도 육당 최남선이 샀다고 하니, 역사의 길과 현실의 길을 간 두 유형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애국지사들이 가문일족을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예가 없지는 않지만, 이렇게 6형제가 전 가솔 60명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는 유일무이합니다. 이들 중에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일부 포함되었습니다.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을 해방시켜주었지만 일부는 망명길에 동참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들 가문의 인본정신과 평등주의 역사인식을 살피게 됩니다.

  선생의 일가는 살을 에는 12월 강추위와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의열단?광복군 등 중국관내와 만주에서 활약한 무장투쟁의 주역들이었고, 이들이 있어 봉오동승첩이나 청산리대첩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당 선생은 이렇게 항상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한 선각자였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사관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를 재현하여 청소년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고자 현재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간도지역을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로 선택한 혜안입니다. 이 지역은 지난날 한민족의 터전이었던 역사적 연고성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이곳을 장악한 나라가 최강국이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내다 본 것입니다. 고구려?당나라?원나라?청나라?일제?러시아 현재의 중국이 그러합니다.

  다양한 인물과 이념 포용한 풍모

  우당 선생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당 선생은 권위주의를 배격한 진정한 자유인이자 공화주의자였습니다. 권위주의로 인해 모든 분파와 갈등과 대립이 생겨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은 독립운동계에서 걸출한 명망에도 불구하고 항상 말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자리와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분파와 다툼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참 선비의 처신이었습니다.

  그 대신 우당 선생은 자주적으로 참여하여 자치사회를 이루고 그 가운데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나아가 자유연합주의에 입각한 새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아나키즘을 수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아나키즘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만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강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처를 북경으로 옮겼을 때 선생의 집은 민족지사들로 붐볐습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이념과 노선을 달리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왕래한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한 때 숙식을 같이했던 단재와 심산도 있었고, 김규식·안창호·조소앙 등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으며, 홍남표·성주식 등 사회주의자들도 있었고, 류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 등 아나키스트들도 있었습니다. 또 김원봉·윤세주 등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의열단 지도자들도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북경에 온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우당 선생의 거처에서 며칠 몇 달을 보낸 후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당시 민족지사들 사이에는 “우당 선생을 뵈었는가, 우당 댁에서 며칠이나 묵었느냐”가 마치 독립운동의 표징처럼 오갈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선생의 북경 거처는 독립운동가들의 의탁처요,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근거지였습니다. 이는 선생의 이념적 유연성과 인간적 풍모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록수>의 작가이자 ‘그날이 오면’의 저항시인 심훈의 회고는 우당 선생의 인간적 풍모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짐작케 합니다. 경성고보 재학생으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룬 뒤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심훈은 대개 그러듯이 우당 선생의 댁에 얼마간 기거하였습니다. 이 때 우당 선생은 이따금 쇠고기를 사다가 볶아놓고 까까머리 젊은 학생과 겸상해 먹으면서 “어서 먹어 집 생각 말구”라고 다독거려 주었다고 합니다. 선생 댁을 나와 혼자 거처할 때도 기름진 중국 음식에 비위가 뒤집혀 조반을 거를 즈음이면 ‘조그만 항아리에 시큼한 통김치를 담아 찾아오던’ 따뜻한 분으로 우당 선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나 어김이 없는 굳은 절개와 결기의 지사가 우당 선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평생을 가시밭길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마지막 가시는 길도 한중 연합의 항일운동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1932년 만주로 향하다가 대련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11월 17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던 것입니다.

  우당이 꿈꾼 사회, 우리 몫으로 남아

  오늘 우당 선생의 순국 75주기를 맞아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점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버린 선생의 헌신과 자기희생 정신입니다. 이는 이기주의와 님비현상이 만연한 요즈음 세태에서 우리가 우당 선생의 삶을 통해 배우는 크나큰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념과 노선을 초월하는 선생의 관용과 포용력 또한 우리가 거울삼아야 할 대목입니다. 이는 낡은 이념대립과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민족 통합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자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유와 평등 사회의 구현을 꿈꾼 우당 선생의 염원을 우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독립운동 당시 선생의 가장 큰 고뇌는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데 있었습니다. 선생은 시대의 조류를 따르고 자신의 천품과 성격에 따라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목적으로 하며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광복한 지 60여 년이 지났고,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꾼 선생의 이상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당 선생이 가신 지 75주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가 선생을 마음 편히 보내드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고, 후대들의 책무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선생의 자주독립 정신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헌신 그리고 행동하는 선비 정신을 보여주신 우당 선생께 깊은 사모의 정을 표하며, 추념사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2007년 11월 16일

독립기념관장 김 삼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