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우당기념사업회 > 78주기 추모행사 기념사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
거룩하신 순국선열의 유족과 독립유공자 및 그 후손 여러분 !
그리고, 자리를 함께 하신 상동교회 서 철 당회장 목사님을 비롯한 교역자 및 성도님 여러분 !

  우리는 오늘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순국하신 우당 이회영 선생의 78주기를 맞아, 다시금 선생과 선생 일가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 거룩한 유지를 받들어 계승하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금년은 우리가 경술국치를 당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또한 우당선생 일가 6형제분과 전 가족이 비장한 각오로 망명길을 떠나신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희들이 금년 우당선생의 추도식을 이곳 상동교회에서 개최하기로 뜻을 모은 것은 선생께서 평생 일관하신 그 불굴의 독립투쟁정신과 사상이 이곳에서 잉태되고 성숙되었기 때문입니다.

  상동교회는 일찍부터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요람이었습니다. 1888년 상동교회를 설립한 스크랜턴 선교사는 상부 교단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회와는 달리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투와 간섭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족지도자들을 보호하여 마침내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본거지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후 상동교회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인 전덕기 목사가 책임을 맡으면서 스크랜턴 선교사의 뜻을 이어받아 당시 민족의 선각자들과 독립협회의 지사, 경향각지의 애국지사들이 마음 놓고 모여서 담론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우당선생은 일찍부터 상동교회와 불가분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전덕기 목사님은 우당선생에게 세례를 주시고 상동청년학원의 학감을 위탁셨습니다. 또 1908년 우당 이회영선생이 이은숙 여사와 최초의 신식 결혼예식을 올릴 때, 이곳에서 전덕기 목사께서 직접 예식을 집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바로 이곳에서 우당선생은 전덕기 목사와 더불어 이동녕, 양기탁 선생등과 함께 최초의 우리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의 무효화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을 모의하였습니다. 1910년, 미증유의 국치를 당하자, 해외에다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모의를 하신 곳도 바로 이곳이었으니,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란 대장정의 출발점이 바로 지금 이 자리 상동교회였습니다.

  그로부터 꼭 100년이 지난 오늘 이처럼 유서 깊은 상동교회에서 우당선생의 제 78주기 추도식을 올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 뜻이 크고도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0년 전 우당선생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 화려한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엄청난 재산까지 다 처분해 가지고 망명길에 오르셨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다시 한 번 선생의 그 숭고한 뜻을 되새겨 봐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당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직계 후손으로서 누대에 걸쳐서 국가로부터 받은 은고, 이에 대한 충성심과 남다른 책임의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어떤 사상에 대한 신념 또한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첫째, 우당선생은 시대의 선각자로서 무엇보다도 문약에 빠진 당시 조국의 운명을 개탄하고 나라와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해 광복운동에 투신하였고, 그중에서도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당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1919년 선생께서는 임시정부의 초대 의정원의 의원으로 참여하셨지만 정부수립과정에서 또다시 문약에 빠질 조짐이 보이는데다가, 파벌까지 조성되어가는 실상을 개탄하고 결연히 북경으로 돌아와 강력한 무장투쟁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우당선생은 일관되게 반상계급의 타파, 적서차별의 시정, 유교의 가부장적 남녀불평등의 폐습을 반대하고, 새로운 자유평등사상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것은 당연한 보편적 가치가 되었습니다만 당시 유교국가였던 우리나라의 사회상으로 볼 때, 이는 분명 놀랍고도 획기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우당은 이런 만민평등의 자유주의 사상가였기에 어떤 속박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가 언제나 “독립운동은 모든 운동가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실존적 자유」를 믿었기에 김창숙이나 신채호 같은 지성들과 세계를 논하였고, 젊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열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년에 선생께서는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의 본거지로 뛰어 들어가, 그 곳 중국 의용군과 제휴해서 일제에게 큰 타격을 가하려 시도하시다가 장렬히 순국하셨습니다.

  셋째, 우당 선생은 강력한 국가권력을 경계하셨습니다. 국가가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면 할수록 이웃나라에 패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진리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 구조를 증오하여 온몸을 던져 싸우셨습니다.

  이런 우당의 우려는 오늘의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이 패권주의로 가는 것을 우리가 경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공동체가 성립되고 있는데도 동북아의 일본과 중국 두 나라는 여전히 국가주의로만 나가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은 패권주의를 낳고, 패권주의는 반드시 평화를 깨트리게 됩니다.

  우당의 가르침은 오늘의 국제관계에서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중앙에 집중된 권력보다는 인민의 복지와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는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력을 이양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선생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과 철학을 그 동안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옳게 조명해 드리지 못하여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남북분단?대치상태에서 북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은 모두 김일성의 전유물로 오도하고, 남에서는 아나키즘을 공산주의의 아류쯤으로 여겨 우당에 대한 연구를 기피하거나, 금기시해 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우당 선생께서 망명하신지 100주년을 맞아 늦었지만 역사적으로 우당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선생이 추구하신 자유, 평등, 복지, 평화사상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 우리가 당면한 정치사회적 모순을 바로잡고 질곡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해마다 공사 다망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내빈 여러분과, 항상 변함없는 정성으로 우당 장학회와 본 기념사업회를 도와주신 회원, 후원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아울러 언제나 말없이 지극한 효성으로, 또 나라와 겨레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사명감으로 본 회의 어려운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 주시는 우당선생의 영손(令孫) 이종찬 관장님과, 영손부 윤장순 이사장님, 그리고 역시 영손 되시는 이종걸 의원님을 비롯한 유족 여러분께 깊은 경의를 표해 마지않습니다.

  다시 한번 우당 선생 영전에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2010년   1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