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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청 소식-망명 100주년을 맞은 중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wo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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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100주년을 맞은 중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투쟁 지도

김구 선생의 저서인 『백범일지』를 보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상동교회에 전국의 청년들이 모여서 상소문을 올리기로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청년들이 도끼를 들고 엎드려 “을사늑약을 무효화하라”고 상소문을 올린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때부터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최초의 항일 비밀결사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전덕기, 이회영, 양기탁, 이동녕이 중심이 되었다.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중구 저동, 지금의 명동YWCA 자리에서 태어나셨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바로 윗 형이시다. 20대 초반에는 자택서재에서 젊은 지식인들과 어울려 정치, 경제, 법률, 역사 등 신학문을 연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이회영은 일가족 6형제와 40여명의 가족이 중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민회 회원들과 만주로 집단 망명한지 금년으로 100주년을 맞이한다. 만주에서는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하여, 이 학교 출신들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주도하고, 광복군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회영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도 참여했으나, 노선 차이로 북경으로 무대를 옮겨 김창숙, 신채호,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한다. 한편 만주지방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기 위하여 한민족 통일회의를 주재, 통의부를 결성하고 의용군을 개편하여 무장투쟁을 지도하였다.

1932년 이회영은 중국 요령성민중자위군 총사령 당취오와 조선인 항일부대간의 협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요령성으로 잠입하던 중국 대련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3일 만에 여순감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이회영은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벌인 “노블리스 오브리즈”를 실천한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중구민들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이 중구출신이라는 점에서 긍지를 갖고,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야 될 것이다.

이회영 선생은 1962년3.1절에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바 있다.

2010/2/25 중구광장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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