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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우당 난초畵, 90년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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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故 이회영-윤복영 가문 ‘아름다운 緣’ 화제

《일제강점기 만주에 독립운동 지도자 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과 그의 동지이자 제자였던 일농(一농) 윤복영(1895∼1956). 1910년대 초 우당이 일농에게 마음의 징표로 그려준 난초 그림 한 점이 약 90년 만에 애틋한 사연과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국내 잠입때 윤씨가 숨겨줘…묵란 그린 부채로 감사 표시
가보로 보관하던 윤씨 아들 “우당기념관에 기증하겠다”

일농의 아들인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5일 “가보로 물려받은 이회영 선생의 묵란(墨蘭)을 11월 17일 추도식 때 우당기념관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회영은 조선시대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으로 일제에 나라를 뺏기자 1910년 그를 포함한 6형제가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가 1932년 순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윤복영은 이회영과 주시경의 문하생으로서 조선어학회, 기독청년회 등을 거점으로 국내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상동교회가 운영한 공옥학교 교사로 일생을 보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이회영은 제자 윤복영을 늘 동지로 여겼다. 1913년 이회영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에서 서울로 잠입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윤복영의 거처였다.

윤 전 장관은 “우당이 방 안 병풍 뒤에서 기거했다는 얘기를 집안 어른들께 들어왔다”며 “우당이 만주로 돌아간 뒤 고마움의 표시로 묵란을 부채에 그려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회영이 만주로 돌아간 때가 1919년이어서 이때쯤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집안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윤복영은 훗날 초대 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이회영의 동생) 등 이회영 일가가 광복 후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본인의 집을 본적으로 해서 호적을 마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회영의 증손자인 연세대 이철우 교수는 “윤형섭 선생의 가문이 우리 집안을 도와주느라 재산도 많이 축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두 집안사람들이 우연히 우당의 일대기를 다룬 강연에 동시에 참석한 것이 두 가문의 사연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강연을 했던 명지대 강규형 교수가 두 가문의 얘기를 듣고 정식 만남을 주선한 것. 이에 따라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과 윤 전 장관이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만나 최근 식사를 함께했다.

이렇게 교류가 시작됐고 윤 전 장관은 부챗살을 뺀 채로 액자에 넣어 보관하던 그림을 우당기념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두 가문은 기증 날짜를 선택하다가 또 한 번 놀랐다. 윤복영과 이회영의 기일이 공교롭게도 양력 11월 17일로 같았기 때문. 윤 전 장관은 아버지 기일인 이날 그림을 돌려주기로 했다.

윤 전 장관은 “10여 년 전부터 기일 추모예배에서 아버님이 우당 일가를 도와 독립운동을 하셨던 얘기들을 손자들에게 들려주었다”며 “올해는 하루 앞당겨 추모예배를 하고 다음 날 우당 선생 추도식에 참석해 그림을 기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당기념사업회는 감사의 표시로 이날 일농과의 인연을 주제로 한 작은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2009.8.6 동아일보 /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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