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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덕일 칼럼]희생과 보상

woo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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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2월 30일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6형제 일가 40여 명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전 재산을 판 40여 만원은 망명자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 가격 3원을 기준으로 소급 계산하면 오늘날의 약 600억원에 가까운 거금이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에 따르면 두 달 전인 10월 7일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멸망에 큰 공(?)을 세운 76명의 양반들에게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다. 이완용·송병준 등의 매국노와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 ‘조선총독부 관보’는 또 그 다음날 1700여 만원의 임시 은사금(恩賜金)을 문무 관리들과 양반·유생들에게 내려주었다고 전하는데,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자서전’에서 “은사금을 받은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했다”고 전한다.

이런 와중에 이회영 일가는 압록강 북쪽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강가에 신흥무관학교를 개설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다녔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자금 대부분은 이회영 일가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란 밑 빠진 독에 천문학적인 거금을 다 쏟아 부은 일가는 비참하게 생활했다. 독립운동가 정화암(鄭華岩)의 회고록 ‘몸으로 쓴 근세사’에는 정화암이 1927년 천진(天津)에 살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66세 때인 1932년 11월 만주로 잠입하다가 밀정(密偵)의 밀고로 대련(大連)에서 체포되어 고문사했다. 그뿐 아니라 6형제 중 5형제가 다 순국했다.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고종황제의 조카였던 조계진(趙季珍)은 해방 후 귀국해서도 중국에서 입던 옷 한 벌밖에 없어 ‘중국 할머니’라고 불렸다.

16일이 우당의 순국 74주기인데, 이회영 일가에게 대한민국은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민주화 유공자도, 동학운동 희생자의 후손도 보상하는 나라에서 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 일가의 희생은 외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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