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한다.

[기독 신문]문소재文巢齎에서 - 신세원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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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이래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집안은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고 재산은 3만석에 이르렀다. 삼한갑족(三韓甲族)에 해당하는 가문이다. 이들이 살았던 곳은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로 지금의 명동성당 앞의 YMCA 부근으로 전해진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우당을 비롯한 6형제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는 결단을 내렸다. 3만석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하였다. 저택과 수많은 고서는 우당이 평소 아들처럼 아끼던 육당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넘겼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 현 시세로 800억원이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만주에 가서 세운 학교가 바로 그 유명한 ‘신흥무관학교’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육군사관학교인 셈이다. 여기에서 배출된 3500명의 병력이 일본군을 상대로 해서 승리한 청산리 전투에 투입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는 이회영 가문의 숨은 봉사와 희생의 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6형제 가운데 우당을 비롯한 5형제는 중국에서 병사하거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만이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이승만 정권시절, 부통령을 지냈다(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8쪽).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과 재산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은 존경을 받아야 하고 역사에 길이 전승되어야 한다.

[기독신문 2005-6-9]김희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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