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한다.

[경향신문] 명문가의 삶 접고 이국땅서'순국한 5형제'

woodang

view : 2753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Ⅳ-2. 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인 우당 이회영(1867~1932)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2월 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시가로 따지면 6백억원에 이르는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하고나서였다.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이역땅에서 펼친 우당 일가의 치열한 독립운동 뒤엔 아나키스트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지도층으로서의 명예와 책무를 위해 재산은 물론 형제들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던 처절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우당 일가의 숭고한 독립투쟁은 지배층이 그에 걸맞은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외면하는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우당의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했다. 이회영은 마흔네살이던 1910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 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운동의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91)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무등(武藤)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大連) 수상 경찰에 붙잡혀 고문치사 당하고 만다. 환갑이 훨씬 지난 예순여섯의 나이였다.

이회영의 형제, 그들의 자제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중 많은 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뒤 귀국,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생활비와 경학사·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한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넷째인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은 덜 알려진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야 그의 사상적 측면이 조금씩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만주 독립운동 시절 우리 민족의 사회 건설 방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민족간에 민족자결의 원칙 수립 ▲독립한 민족 내부에서 자유 평등 원칙 실현 ▲독립 후 지방 분권적 지방자치제 확립·지방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 구조 구성 ▲일체 재산의 사회화 및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 ▲교육의 사회적 공영화 등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일제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를 배격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한 사상적 선을 그었으며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이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회영은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추구했다”며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억압당한 자로서 독재에 저항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미의 민족주의였으며 독립후에는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해방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대, 그것도 이름있는 양반가 출신인 이회영이 자유와 평등,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경이”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의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현 시점에 자유 평등에 기초한 그의 이상과 신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
--------------------------------------------------------------------------
막내 규동씨가 전한 ‘고난의 가족사’ [어머니 궂은 일 해서 번돈 만주로 송금]

우당 이회영의 막내아들 규동씨(78)가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여섯살 때인 1932년 11월28일이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련에서 고문으로 사망해 화장된 뒤 한 줌의 재로 고국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지난 2일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만난 규동씨는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며 “돌이켜 보니 참 기구한 인생”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규동씨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어머니(이은숙·1979년 작고)는 자금조달책으로 국내에 계셨다”며 “하지만 일제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이씨는 바느질삯, 식모일 등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며 모은 돈 대부분을 만주로 송금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규동씨를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지였으며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의 순국 뒤에도 비참한 가족사는 이어졌다. 1935년 규동씨의 형 규창씨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국내로 압송됐다. 규동씨는 “어머니는 형 옥바라지를 하느라 국내에 남았고, 나는 만주로 떠나 누님들과 함께 지냈다”며 “그때의 어려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규동씨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가족 모두가 해방 이후에 갖은 고초와 가문이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었다”면서 “사촌 형제 대부분이 근근이 사는 형편으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그다지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6형제의 당시 선택을 원망한 적은 없었느냐’는 우문에 “윗대의 큰 결정은 여전히 내게 큰 자랑이며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항상 우러러 보며 살았다”고 답했다.
규동씨의 큰 아들은 현역 국회의원인 종걸씨다. 규동씨는 “내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도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항상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해 규동씨는 “친일파 후손들이 땅을 찾겠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거꾸로 가는 역사가 안타까웠다”며 “누가 누구를 복수하는 문제가 아니며 과거 일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내야 하는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05-3-8] 〈김종목기자〉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