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생애와 사상 > 특강 II

 

 

 

 

 

 

 

 

오늘 모임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순국을 추모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마땅히 우당 선생의 아나키즘 정신과 행적과 다루어야 하겠지만,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발표자로서는 선생이 살던 시대와 정신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논하는 것은 요령부득이 아닐 수 없다. 우당 선생이 얼마나 위대한 애국지사였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짜 양반’이었는지를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거의 대부분 소상히 알고 있을 터이므로 거듭 칭송하고 찬사를 보태는 것은 이 자리를 따분하고 지루하게 할 것이다. 더욱이 죽은 자에 대한 찬사는 마치 조위금처럼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살아 있는 후손, 후세들에게 돌아갈 뿐, 그를 살아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발표자는 기왕에 널리 알려진 우당 선생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칭송을 보태기보다는 선생을 살아 돌아오게 하는 논의가 생산적일 것이며, 또한 우당선생을 더 기쁘게 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당 선생을 비롯한 당대 아나키스트들의 사회혁명의 이념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사실적(史實的) 정당화’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 정당화’를 보탬으로써 그들의 아나키즘 정신을 오늘 우리 앞에 살아 있는 이념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글은 지난 100년간의 한국 아나키즘, 그것은 무엇이었던지에 대한 사실과 역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해서 아나키즘이 기술적, 문화적, 인간의 삶의 조건 전반이 변화된 세계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유효적절한가를 논증적이고, 설득적으로 보여주는 이론적 작업의 대강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 글에서는 아나키즘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선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아나키즘이 새롭게 주목받는 세계사적, 문화사적, 철학적 배경을 탐색한다. 이어서 지난 100년간 한국에서 아나키즘이란 어떤 의미였으며, 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원인을 살핀다. 이어서 발표자가 연구책임자로 있는 <한국 아나키즘 100년 연구>가 갖는 의미, 연구목적과 연구내용 등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아나키즘이 생태계 위기와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적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발표자가 1995년 개념화한 에코아나키즘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에서 포스트모던적 문화 이념을 지칭하는 신개념으로 ‘아나키즘’이 등장한 것은 채 10년이 안된다. 물론 그 이전부터 아나키즘이라는 단어가 쓰이긴 하였지만, 그 내포(內包)는 여전히 무정부주의였다.

무정부주의로 명명되던 시기의 아나키즘은 하나의 유토피아였다. 모든 사회이론이 그러하듯이 19세기 노동운동의 질풍노도를 겪으면서 절대적 자유와 권력 없는 지배라는 아나키즘의 호소는 더없이 매력적인 유토피아였다.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인 꿈으로 간주되게 된 데에는 19세기 아나키스트들의 대안이 맑스주의의 혁명이론에 비해 치밀한 실천적 조직력을 갖지 못했던 것도 한 원인이지만, 더욱 중요한 원인은 당시 시대정신이던 맑스주의·사회주의 노동운동 이념의 악의적인 왜곡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민족적 현실 속에서 한국 아나키즘은 두 개의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의 방해 때문에, 정치 이데올로기로도, 사회운동의 이념으로도 자리잡지 못했다. 특히 일제하 한국 아나키즘이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합한 사례는 항일무장투쟁을 정당화하고, 민족해방운동 진영 내의 전략 전술로는 효과적이었으나, 아나키즘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또한 해방 후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 정당을 만들어 현실의 대의정치와 타협을 시도함으로써―다시 말하면 낡은 혁명적 구호와 의상을 걸치고 현실 정치의 잣대를 가지고 아나키즘의 현실적 변용을 기획해왔다는 점에서―아나키즘의 질곡은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최근 10여년 사이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의 확대는
① 이성중심적 사유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
② 정의-유토피아(just-Utopia)의 실현이라고 믿어왔던 동유럽과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③ 구체적 현실로 등장한 생태계의 위기와 환경파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④ 국민국가의 구조변경을 강요하는 세계화·정보화 등 20세기 마지막 20년 동안의 과학기술적 진보와 역사적 사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런 일련의 세기말적 변혁에 직면하여 한국 아나키즘은 단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1. 아나키즘은 일단 낭만적인 혁명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취향으로, 맑스주의-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하는 일종의 대안적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는 사회의 필연적인 발전-운동법칙을 제시해준다고 믿었던 맑스주의에 대한 의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2. 아나키즘이 새로운 세계 해석의 틀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모색이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문화의 세계화로 인한 전통과 현대의 갈등 및 역사적 비연속성과 가치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유효하고 적절한 논거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은 대화기술, 의사전달 방식, 상호부조 및 상호적대 방식을 전면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른바 변화된 문화적 사회구성체에서 ‘자유로운 개인-자율적 연대’라는 아나키즘적 사회조직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3. 에코아나키즘, 문화아나키즘, 생활양식(lifestyle) 아나키즘 등의 현대적 변용들은 ‘삶의 디지털화’라는 현대적 조건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매력적인 툴(tools)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급기야 아나키즘은 이데올로기 없는 시대의 대안적인 사회 이념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정보사회는 개인들을 고립시키고 파편화한다. 개인은 바이트(byte)화, 디지털화(being digital)하는 정보적 존재로 된다. 정보사회의 개인들은 산업사회에 비해 비현실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지만, 현실적인 사회적 활동 공간은 축소되고,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최소화한다. 존재의 디지털화, 그 자체가 이미 존재론적으로 아나키즘적이기 때문에, 하위문화·저항문화·반문화의 표상인 아나키즘을 이해하지 않고는 현대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1993년 여름 안동 하회마을에서 하기락, 이문창, 조광해 선생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제1회 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한국 아나키즘의 의미있는 새출발이었다. 졸저 ?에코필로소피(1995)에서는 아나키즘의 이론적 지평 위에서 후기-현대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적 대안으로 ‘에코아나키즘’을 제시함으로써 신-아나키즘의 길을 열었다.
1996년 필자를 비롯한 몇 사람이 함께 "아나키·환경·공동체"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아나키즘은 좌절한 좌파 사회주의 실존의 아득한 추억도, 낭만적인 혁명의 열정도,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의 자기 파괴적인 모험도 아닌, 포스트모던, 정보화, 다지털화하는 세상을 설명하는 정당한 하위문화(sub-culture)임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아나키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7년간의 연구 성과는 아래 <표>에서 보듯이 해방 후 90년대까지 50년간 단 10권의 저작이 출간된 것에 비교하면 가히 괄목할만한 하다. 또한 96년 이후 박사학위 논문 수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정대호, 이원식, 김은석, 이호룡, 김경복, 박제균, 이종훈 등 7~ 8명이 국내 대학에서 아나키즘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학    술    서

평 전 / 기 타

도    서    명

저자/역자/발행연도

도    서    명

저자/역자/발행연도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오장환 (1998)

박열 평전

김삼웅 (1996)

중국의 아나키즘

조광수 (1998)

저주받은 아나키즘

골드만/김시완 (2001)

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볼프/임홍순 (2001)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2001)

휴머니즘의 옹호

북친/구승회 (2002)

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정선태
(2003)

한국의 아나키즘

이호룡 (2001)

크로포트킨 자서전

크로포트킨/김유곤
( 2003)

동아시아 아나키즘

조세현 (2001)

아나키즘 시와 생태학적
유토피아

김경복 (1999)

소유란 무엇인가

프루동/이용재 (2003)

아나키즘의 역사

프레포지에/이소희
(2003)

우리시대의 아나키즘

숀 쉬한/ 조준상 (2003)

 

 

 

(1) 한국 무정부주의 백년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듯이, 한국 아나키즘은 일본의 식민지 하에 있던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활발하였다. 그것도 철학·정치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사회운동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나키즘을 알게 된 것은 20세기 벽두이다. 식민지 시대에 수용됨으로써 한국 아나키즘은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저항적 성격을 띠고,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합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이론과 실천 이념이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출발부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어 심각한 내부갈등을 보여왔다. 아나키즘은 이념적으로 제3의 길을 걸음으로써,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자하였다. 아나키즘 진영은 민족주의 진영에 노동자·농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볼 것―즉 민족 구성원 내부의 평등의 가치 실현을 요구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에는 소련에 대한 사대주의적 자세를 청산할 것과 인간의 자유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써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에 강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특히 아나키즘 진영은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헤게모니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연한 연합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아나키즘은 민족해방운동 초기에 사회주의 진영과 연합전술을 구사하다가 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주의 진영과 연합전선을 결성했다. 예를 들면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반 만주에서 김좌진 중심의 민족주의 진영과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것이나, 1930년대 말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 세력과 연합전선을 결성하였다.
한국 아나키즘은 민족해방운동에서나 해방 후의 활동에서 보거나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문화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수십 개의 정당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아나키즘은 정치운동보다는 사회·문화운동에 나섰다. 1945년 9월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결성하고 곧이어 <조선농촌자치연맹>과 <조선노동자자치연맹>을 결성한 것 등이 그 예이다. 1946년 <전국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한 다음, <독립노동당>을 창당했으나 이정규 등 사회운동계열의 아나키스트들은 불참하였다.
이처럼 아나키즘은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적 나침반의 구실을 하였으며, 20세기 전반부 50년 동안 해방과 자주를 향한 투쟁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음에도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 민족정신사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아나키즘의 이론과 실천을 역사화하지 않고서는 한국 현대사 백년 역시 단절과 왜곡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해방 후 한국 아나키즘은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거의 무시되었다. 신채호, 이회영은 그나마 초보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엄형순(1906~1938), 백정기(1896~1934), 오면직(1894~1938) 등은 60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고, 해방 후까지 활동한 유자명(1891~1985), 정화암(1896~1981), 유림(1894~1961)에 관한 연구는 시작도 못한 상태이다.

(2) 한국 아나키즘 백년 연구의 의미
<한국 아나키즘 100년 연구>는 그동안 단편적으로 연구되어 왔고, 파편화된 아나키즘 이야기들(Geschichten)을 민족사의 지평 위에서 조각 모음하여, 한국 아나키즘의 이론과 실천을 20세기 한국사박물관의 합당한 자리에 위치시키고, 그 역사적 위상을 정당하게 평가함으로써 한국 현대사 100년의 질곡과 단절을 이어 민족사의 완성에 기여하는 한편, 아나키즘을 다문화주의 시대의 대안적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연구목적 하에
① 사료 수집 및 정리,
② 아나키즘 이론사 및 철학적 평가
③ 한국 정치사와 아나키즘
④ 문학·사학·철학·예술 등 다학문적 연구
⑤ 21세기 문명사와 아나키즘의 역할 등을 주요 연구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는 아래의 목차로 구체화될 것이다.

서 론
I부 : 아나키즘의 등장
  1장.  아나키즘의 기원과 개념
  2장.  서구 아나키즘의 역사적 전개
  3장. 유럽 제국의 아나키즘 운동

II부:  동아시아의 아나키즘
  4장. 일본의 아나키즘
  5장. 중국의 아나키즘
  6장. 동아시아 아나키즘과 민족주의

III부: 한국 아나키즘
 7장. 한국 전통사상과 아나키즘

 8장. 식민지 전반기 한국 아나키즘
 9장. 식민지 후반기 한국 아나키즘
 10장. 중국과 일본에서의 한인 아나키즘
 11장. 해방 후 한국 아나키즘: 유신 이전까지
 12장.유신 이후 한국 아나키즘

IV부: 아나키즘과 예술
 13장.아나키즘의 미학이론
 14장.아나키즘 문학의 수용과 전개
 15장.아나키즘 소설
 16장.아나키즘 시문학

결 론 : 한국 아나키즘의 미래

<한국 아나키즘 백년 연구>는 아나키즘에 대한 다학문적, 학제적 연구이다. 문학·예술, 철학·사상, 역사적·실증적 차원에서 각 주제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의열단 활동’에 대해 다룰 경우, 우선 사학 전공자가 역사적 서술을 하면, 철학 전공자들은 그 활동에 대한 철학적 의미부여 및 역사적 평가 작업을 하고, 문학 전공자들은 의열단의 활동 등이 문학작품 및 예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각각의 주제들을 이렇듯 다층적이고 다양한 분야의 시각으로 조명함으로써, 단순히 사건기록 혹은 사료 정리의 차원을 넘어, 민족사의 의미 있는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며, 후학들의 연구에 비교 지평을 제공할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한국 인문학 연구의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학제간 연구와 의사소통의 단절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냉전체제의 종식은 세계에게 다양성·상대성·문화적 다원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냉전 이후의 정치지형은 일개 국가의 압도적 우세 속에서 세계화가 진행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9·11테러에서 보여주듯이 세계는 다양성·다문화주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공존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정치지형은 아나키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우리의 연구는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기에 ‘아나키즘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답하고자 한다.
세기 말 이데올로기 갈등의 소멸은 문화적 갈등의 표면화를 불러왔다. 더욱이 생태계와 환경의 파괴는 인류에게 이 문제가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 화급한 숙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 인류는 문화적 공존과 생태계 안정이라는 제2의 현대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아나키즘이 제2의 현대를 완성하는 하위문화의 하나로서 새로운 범형(paradigm)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미래 조망은 막연한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 있는 변화들에 기초한 과학적 투사(scientific projection)이다. 우리의 연구는 세계적 조망 속에서 과학적 투사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조망한다.
특히 1972년 유신 이후 한국 아나키즘 이론과 실천에 대한 활동’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정리되지 않았던 부분으로
① 세계 아나키스트 운동과 연계한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
② 아나키즘 이론으로 돌아오다,
③ 시민운동과 아나키즘,
④ 다원 아나키즘의 등장(Lifestyle 아나키즘/사회적 아나키즘/에코아나키즘),
⑤ 공동체운동 및 생태사상과 아나키즘에 대한 국내의 논의를 다룬다. 연구의 성과물은 2권의 연구서―『한국의 아나키즘I』,『한국의 아나키즘II』―와『한국 아나키즘 사료집』으로 출간된다.

이는
(1) 한국 현대사 100년의 고비마다 등장하는 아나키즘의 실천과 한국의 현대성(moder- nity)의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아나키즘 이론과 정신을 통해 현대 역사사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2) 아나키스트들의 생생한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민족자존을 일깨우고, 정보·통신 기술과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로 황폐화되어 가는 개인들에게 휴머니즘의 중요성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3) 지금까지 연구된 아나키즘 관련 저작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남긴 행적의 단편들을 모자이크하여 소개되고 있는 데 반하여, 본 연구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아나키즘 이론의 전개과정, 드라마틱한 실천을 다학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중요한 학술적 가치는 물론이고 대안적 문화양식, 생활양식으로서 다양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자유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1) 아나키 사회
아나키즘은 어떤 사회 체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운동이다. 어떤 거대한 세계 설명의 원리도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없는 포스트모던한 세상에서 아나키즘은 미래의 이상적인 사회체제를 설명하는 원리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운동의 행동수칙으로 변용되어야 한다. 어떤 거대한 세계 설명의 원리(거대서사)도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없는 후기-기술사회에서 아나키즘은 이상적인 체제를 설명하는 원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운동의 행동 강령이다. 사상·신념체계로서의 아나키즘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데 사회 제도와 같은 인위적인 체계가 본성을 악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② 아나키즘은 사회가 자연계약에 의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구성된 결사로 본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사회관을 가진다.
③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의 절대 가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자기 규제된 자유이며, 자연공동체 내에서의 연대의 자유이다.
④ 협동과 공생에 기초한 소규모 자연공동체를 주장한다. 아나키 공동체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조장하는 욕망의 확대재생산이 없다.
⑤ 따라서 아나키 공동체는 욕망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아니라, 강제된 욕망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이란 원래부터 착한 존재이기 때문에, 혹은 인간 본성을 사회화하기만 하면 억압 없는 질서는 언제든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으로는 아나키 공동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 국가 없는 아나키 공동체가 가능하려면, 그 구성원들의 생명과 사유재산의 안전 및 평화와 안정을 지속시키는 질서가 필요하다. 개인은 이기적이어서 질서를 해치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자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공선(public good)이 있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질서는 하나의 공공선이 된다. 개인이 이기적인 한, 자신은 기여하지 않으면서 타인 혹은 타 집단이 제공하는 선(善)의 총량으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무임 승차자(free rider)가 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여에 상관없이 공공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전제해야 된다. 만인이 무임 승차자가 되려 한다면, 공공선은 없을 것이고, 따라서 공공선은 국가의 정당화의 기초가 된다.

(2) 아나키와 국가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는 평등을 실현할 수 없다. 아니, 불필요한 제한과 강제를 동원해서 현실적인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일정한 영토 내에서 힘(force)의 합법적인 행사권을 독점하고 있는 인간들의 결사(association)”라는 베버적인(Max Weber) 의미의 국가 부재를 요구한다. 국가가 물리력의 합법적인 행사권을 독점(폭력의 독점)하고 있다고 해서 국가가 힘을 행사할 구체적인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집단도 자신의 힘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국가가 되려면 실행력 있는 힘의 수단을 가져야 한다. 베버의 설명에서 그것은 폭력의 집중이다. 국가가 존재하려면 힘을 행사하는 수단의 집중이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는 모든 국가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폭력을 행사하는 수단의 분배 역시 언제나 약간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면 폭력을 행사하는 수단의 분배, 즉 실제로 폭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전혀 불평등이 없는 순수 아나키 사회는 가능할까? 우리는 원시 사회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하지만 원시사회에서도 폭력의 행사는 근대 국가와는 달리 아주 엷게, 넓게 분산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원시사회에서도 성과 연령에 의한 폭력 행사권의 불평등한 분배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다만 현대 국가처럼 폭력 행사의 독점권과 폭력 행사를 허용할 권리를 독점적으로 소유한 전문가 집단·기관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아나키와 유사하다.
타인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개인들의 사회란 없다. 즉 권위없는 사회, 강제가 없는 사회란 불가능하다. 아나키는 폭력의 완전한 분산과 정치적인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국가가 없어진다고 아나키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의 집중과 정치적인 전문화의 부재, 그것이 아나키다. 여기서는 폭력의 행사에 버금가는 다른 능력에 의해 견제될 수 있고, 권력과 강제는 신념과 가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폭력에 대한 통제권이 평등 사회이다.
아나키즘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의 기초를 반증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율성에 기초한 정당한 권위로부터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를 제시한다. 국가의 정당성은 정치적 권위가 도덕적 구속력을 가질 때에만, 즉 국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율적 의무가 일치하는 곳에서만 확보된다. 국가의 폭력 독점이 없이도 장기적인 안전과 평화가 가능하려면 구성원의 자율적인 의무에 기초한 ‘사회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질서는 모든 결사체의 제1 조건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질서를 해치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자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질서를 강제할 권력이 생겨나고,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독점하고, 정당화한다. 어떤 이론이나 신념체계는 질서 유지 체계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가 얼마나 정교한가에 따라 유토피아로 되거나, 사회주의처럼 현실적 사회운동 이념이 되거나, 혹은 민주주의처럼 체제로 된다.
아무런 폭력도 없는 사회를 약속하는 이론이나 신념 체계를 ‘순수 유토피아’라 부른다. 아나키즘 역시 그 강력한 인간주의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과격한 유토피아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폭력의 독점이 없는 아나키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행사의 독점권과 폭력 허용권을 독점적으로 소유한 전문가 집단 및 기관을 갖춘 현대 국가와 달리, 폭력권이 상대적으로 아주 엷게·넓게 분산되어 있는, 다시 말하면 폭력 행사권의 분배가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국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 독점’과 그것을 행사할 독점적 권리를 가진 ‘정치적 전문가 집단’을 거부한다. 아나키즘은 좀도둑·폭행은 있으되, 아우슈비츠는 없는, 강도는 있지만, 제도화된 폭력에 의해 수백만, 수천만이 압살당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전이다. 이는 비전은 공동체 이론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3) 생활양식 아나키즘 vs 에코아나키즘
에코아나키즘이라는 개념은 졸저 "에코필로소피(1995)"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현대 아나키즘의 중요한 흐름이 되고 있다. 이 책을 쓰기 전에 필자는 고전 아나키즘 저작을 섭렵할 기회가 있었다. 이데올로기적 전선이 비교적 단순했던 고전 아나키즘(가드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을 다원적인 갈등과 분화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적인 논쟁의 무대에 세우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이를 현대사회의 문제에 적용 가능한 이론으로 재구성해 보자는 의도에서 에코아나키즘을 제안하였다. 그 내용은 졸저 "에코필로소피(1995)"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이 개념은 생태학적 지평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현대의 생태사상은 철학, 사회학, 정치학과의 결합이 두드러지는 바, 근대 세계에서 주체의 지배권 강화를 주도해 온 이들 학문분과들은 최근 2~30년 사이에 급부상하고 있는 생태학적 사유와 결부되면서,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그 출생 배경이 무엇이건 간에 ‘생태학적·환경론적’ 문제제기를 끌어들이는 태도는 요즈음 학문 활동의 유행이 되었다(생태정치학, 생태사회이론 , 생태학적 여성학 등등). 심지어는 과거 이들이 성취한 이성적 기획의 귀결들을 전면 부인하는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에코아나키즘의 역시 동일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에코아나키즘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감수성과 사회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실천적인 운동을 수행할 것인가? 아나키즘에는 다양한 부류, 노선들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연합주의, 아나키-공산주의, 상디칼리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등이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에코아나키즘, 문화 아나키즘, 생활양식 아나키즘 등이 주목을 끌고 있다.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 할 만큼 상이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현대 아나키즘의 두 흐름―생활양식 아나키즘과 에코아나키즘―은 둘은 자유사회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론적·실천적으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하나는 극단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해방에의 노선을 표방하고,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를 이념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공동체주의적 노선으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를 추구한다. 이는 공적 영역에서 자본주의에 대적하기 위한 대중의 동원, 상디칼리즘적인 조직, 노동자 투쟁 등의 방법을 선취하고 있다.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추상적인 개인’을 강조하고, 가끔은 부르주아적 신념들에 의거해서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들은 자유의 본질적인 개념을 문제삼기보다는 개인의 자율을 강조하고, 만사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보니 ‘무엇을 위한 자유’보다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중시한다. 이는 개인의 권리와 자아존중, 개성을 강조했던 19세기말~20세기초의 개인주의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자유와 자율을 확보한 자유 개인(free individuals)이란 개인의 감수성을 풍부히 하고,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주어진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사실 생활양식 아나키즘이란 20세기에 있었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은 자유 개인을 성취하는 조건에서 개인의 문화적,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혁명은 가고, 다양한 반혁명적 사조가 붐을 일으키던 지난 세기 60~ 80년대에 조성되었다.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적인 경향, 신비주의적·반합리주의적·전체론적(holism) 경향에 기울게 되었고, 사회적 관심사보다는 개인적 관심사에 주목하게 만들었으며, 숙명론적이고 극단적인 반-유토피아적 의식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의 기본구조와 경제관계에 도전하기보다는 일상의 작은 문제들에 집착한다. 그래서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전투적이지 않으며, 반혁명적이다. 이는 탈현대라는 우리 시대의 도덕적·사회적 기질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퇴보적이고 자폐적이다.
에코아나키즘은 구체적인 인간을 문제삼고 있으며, 자유로운 정치·경제 제도에 의거하여 인간성이 총체적으로 해방되는 자유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아나키즘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 개인이란 행위 주체를 의미하며, 이는 진정한 자유 사회에서만 구체화될 수 있다고 본다. 어림잡아 20세기 중반까지 강한 대중성을 지녔던 사회(주의)적, 혁명적, 공동체주의적 아나키즘은 그러나 지난 세기말 경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강세 속에 번번이 실패하였다. 자본주의가 세계체제로 안정화되면서,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개혁 지향적인 좌파 사민주의, 중도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급진 좌파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에코아나키즘은 공동체 이론과 더불어, 공동체에 의해 구현되는 아나키즘의 현대적 재해석이다.

 

역사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술하는 것이고, 철학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승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양이다. 아나키즘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승리해 본적이 없다. 아니,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아나키즘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자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맑스주의와 현실사회주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사실, 대의 민주주의는 관용과 타협을 위한 최선의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국가의 폭력 독점과 국가 권위의 정당성을 회의하라고 착한 대중의 반역을 충동질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아나키즘은 세기말의 문화적 퇴폐로 인해 부식하는 인간의 사회성을 복원하는 휴머니즘의 기획이며, 그로부터 ‘사회적 역동성’을 끌어내는 사회 운동의 이념이며, 다양성을 본질로 하는 현실의 ‘가짜 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거대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두 영역의 전체주의적 지배 하에 있는 ‘가짜 자본주의’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려는 의미있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