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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32년생으로 1949년 6월부터 해롱현 조선인 해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50년 12월 조선혁명군 출신인 김소묵(1897년-1965년)씨가 우리학교의 교장으로 부임되었습니다. 김소묵씨는 1917년 흥경(지금의 신빈)현에서 조선혁명군에 가입했고 조선혁명군 정무원 총리인 이동산의 서기관으로 담당했습니다.

1950년 12월부터 김소묵 교장과 교육사업을 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틈을 타서 늘 자신의 과거사며 한국독립군과 이회영, 이상설, 김구 등에 대한 독립투쟁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소묵 교장의 소개에 따르면 우당 이회영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일찍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꾸려 독립운동의 기반과 인재를 배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당선생은 일생을 벼슬을 사양하시고 항일의 정당성을 선전고동하시면서 『단합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늘 말씀하셨고 『주위여하를 불문하고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는 의향만 같으면 연합한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답니다.

김소묵 선생은 “이회영 선생은 1931년 해마다 여러 차레 동북의 화인, 신빈, 통화, 해룡, 유하등 한국인이 많은 곳에 오셔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셨는데 신분은 점쟁이, 상인으로 가장하여 다니었고, 항일구국 운동의 장기성을 말씀하시면서 후대에게 구국임무를 넘겨줄데 대한 의사를 말씀하시면서 학교들을 세우고 학교에 자금을 지원하셨다”고 소개하였습니다. 김소묵 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회영 선생은 자신을 무척 사랑해 주셨고 상급을 명한 한국독립군 장령이며 자신에게 여러차례 특수한 임무를 부여한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김소묵 선생의 원명은 金在天이였는데 우당 선생이 소묵씨를 만날때마다 별명으로 꼬마 검둥이(小黑犬)이라 불러 주셨기에 후에 김소묵(金小?)이라 불리우게 되었답니다. 뒤에는 “너(소묵씨)는 말이 많으니 좀 잠자코 있으라”는 의미에서 소묵이란 이름이 알맞다고 웃끼곤 했답니다.

1991년에 정년 퇴직한 저는 중고등학교 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쳤기에 우리 매하구시 조선족교육발전사를 편찬코저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매하구시, 유하, 휘남현 조선족학교들 조선족원거주지 현, 시의 서류관 자료, 역사서적, 항일투쟁사, 통화지구 혁명사 등등 답사, 열독하면서 우리시 조선족교육의 뿌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장장 11년간 저는 매하구시 조선족교육사 편찬과 자료수집에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저는 현지답사, 현지인 탐방 광복전 유관자료를 통하여 매하구시 조선족교육의 선구자는 우당 이회영 선생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당 선생이 직접 꾸리신 학교는 5개소 부하를 시켜 세운 학교가 3개소로 우당 선생의 참여와 배려하에 세워진 학교가 8개소 된다는 것을 조사하고 유관기관의 긍정을 받았습니다.

해룡현 현지(海龍縣志)에 따르면 이회영 선생은 신흥무관학교와 때를 같이 하여 해룡현 도무거우에 한의 의사(衛生)학교(훈련반형식)를 세우시고 해룡현“수도향 복흥무관학교”(지금은 “유하현 라문향복흥소학교”로 행정구역이 바뀌였음)를 꾸리시였습니다. 위생학교는 동의학이 위주로 소화 불량치료, 침구, 전염병치료, 초약을 쓰는 법들을 가르치는 강습소 형식이였는데 약 반년간 꾸리다가 조선인 보통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이곳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92세 되는 류대년(劉大年)이라는 노인이 이 사실을 증실(증언)하고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복흥무관학교”는 1936년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였는데 다량의 항일 일군을 배출시켰습니다. 1936년 일본 군대의 토벌로 136명이 일제에 의하여 학살되어 지금까지 청명때면 그곳 주민들이 그들의 묘소를 찾곤 합니다.

1912년 “해룡현 길락학교”(증명인 王可? 89세), 1922년에 “해룡현 산성진조선일학교”를 꾸렸는데 지금가지도 그때 그 학교의 일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933년 “三八石조선이 학교”와 “二八石조선초등학교”를 직접 꾸렸습니다. 우당 선생이 부하를 시켜 해룡현에다 “四八石중흥학교”,“중화향평등학교”, “산성진영승학교”를 꾸리게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해룡현에 조선인 거주가 많지 않아 학교 규모가 아주 작았고 고정된 교사가 없었으며 가정집에서 학년의 구분도 없이 교원 한분이 전 학년을 돌아가며 교육을 하였습니다. 매하구시 조선족교육발전사를 쓰면서 역사재료를 연구하고 현지 탐방을 하면서 우당 선생은 통화지역과 매하구지역조선족 교육의 선구자시란 것을 유적과 현지인을 통하여 절실히 느끼게 되었으며 그분의 업적이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빛을 보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으며 많은 정력을 들여 발굴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매하구시에는 3만 여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조선족소학교, 조선족 초급중학교, 통화지구에서 제일 큰 조선족고급학급학교까지 자체의 교육체제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당 선생이 뿌리신 교육의 씨앗이 자라 성장한 결과라고 봅니다. 지금 해마다 약 200명의 조선족이 중국에서 유명대학-청화, 북경대학교 등에 입학한답니다. 이것이 바로 백년수인(百年樹人)이 아니겠습니까?

매하구시 조선족들은 오늘도 우당 선생을 기억하고 있으며 선생의 업적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