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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선생의 위대한 생애와 사상을 우당 선생이 위대한 삶을 살았다는 데 그 내용을 살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일제는 한국을 병탐하자마자 조선의 귀족, 명문대가, 사대부를 포함한 지배계층이 일제히 일본에 귀속되었음을 찬동하고 적극 지지하였다고 선전했다. 어떤 면에서 일제가 이런 악선전하는데 부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말의 고관대작들이 대부분 일제가 수여하는 작위를 받았고, 이에 빌붙어 살면서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당 가문만은 달랐다. 그들은 일제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난의 항일전선에 몸을 바쳤다. “우리가문은 대대로 조선시대 중추적 충신을 배출했다. 대과급제한 이가 170. 정승 8, 대제학이 3, 임진란 때에는 국방과 외교에 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도, 일선에서 싸운 충무공 이수일장군도 모두 우리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이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위기에 처했는데 비굴하게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가문의 전통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항일의 변이었다. 이런 선비정신으로 일가족이 모든 가산을 팔아서 독립투쟁에 바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친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끝까지 항일하는 사람도 있음을 확인케 했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나라가 망하게 된데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민족이 너무 문약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하시고 지덕체(智德體)를 갖춘 강건한 인재를 양성하셨다. 선생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은 특별한 뜻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문관우위의 정신이 나중에는 무관천시의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율곡선생의 10만양병설이 무시당하여 결국 임란의 화를 당하게 되었고, 조선조 말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우리나라를 제집 드나들 듯이 판을 치고 싸움을 벌려도 속수무책이었다. 오죽했으면 나라의 임금이 외국공관으로 피신하여 1년간 피난살림을 했을까? 그러나 이웃 일본은 서구의 침략이 시작되자마자 즉각 부국강병 정책으로 일어서서 동아를 호령하게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비록 이웃나라를 괴롭히는 패권은 행하지 않더라도 나라라도 제대로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스위스처럼 나라가 강해야 이웃이 넘보지 않는다. 패권국가간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려 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 독립운동은 먼저 학문과 지식을 넓혀서 국제정세와 과학의 발전을 인식함과 동시에 체력을 키우고 개척정신을 가다듬어 고난의 항일투쟁에 굴하지 않는 강건한 육체와 정신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런 깊은 뜻으로 신흥부관학교 설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제일 먼저 부닥친 난관은 중국인이나 중국당국이 중국 땅에 조선의 독립을 위하는 무관양성기지를 혀용 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우당은 이상룡 (石洲 李相龍)선생과 더불어 북경의 중앙정부를 찾아가 교섭끝에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닥친 어려움은 섭씨 30도에 가까운 추이와 양식의 조달이었다. 초기의 개척자들은 경학사(耕學社)를 세워 한편으로는 농지를 개간하고 한편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산학협동의 정신을 당시 이미 실천했다.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초기 이민 개척자들이 ‘키브츠’(집단생활 공동체)를 세우고 ‘하가나’라는 민병조직을 갖춘 것과 유사한데 이를 100년전에 추진했던 것이다.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그 후 독립투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은 물론이다.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지도한 청산리(靑山里) 전투, 홍범도(洪範圖)장군이 지휘한 봉오동(鳳梧洞) 전투에 투신한 용사들은 대부분 이 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흥무관학교는 그 후 광복군 태동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조선시대 봉건적인 사회에서 성장하셨지만 당시 사회적 인습을 타파하고 개혁의 삶을 사셨다. 선생은 당시 계급사회의 인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솔선하여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적서타파(嫡庶打破)에 힘쓰셨다.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재혼금지(再婚禁止)를 스스로 반대하여 그분의 누이를 몰래 재혼을 시킨 숨은 비화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거사였다. 만주에 망명하면서 그분을 따라 온 모든 노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편입시켰으며 독립군의 동지임을 자각케 하였고 노비에 대한 차별적 낮춤말을 평등한 높인 말로 대화하도록 격려했다.  이러한 선생의 고결한 선각자적 정신은 독립투쟁 과정에서도 일관하셨다. 선생이 열망했던 이상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구현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에 참여하셨으나 망명정부라도 하나의 정부기구로 권력이 집중되면 결과적으로 지위와 감투욕 때문에 투쟁력을 저하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북경으로 돌아와 신채호(丹齋 申采浩)와 더불어 몸소 실천을 통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생애를 마쳤다. 당시 선생은 “조선이 독립하면 강력한 중앙정부보다는 분권화된 지방정부를 키우고 자유공동체를 설립해야 한다.”고 설파하셨다. 또 선생은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하면서도 한국과 중국의 동지들과 더불어 호남성(湖南省) 양도촌(洋濤村)에 자유공동체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일생을 통하여 동지와 더불어 계셨다. 그러므로 우당기념사업회나 우당기념관은 이런 선생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살리고자 우당 개인만을 기리고 영웅화하기 위해 출발하지 않는다. 우당선생과 더불어 새로운 나라 건설에 참여했던 분들과 더불어 숨쉬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선생은 몰락한 조선왕조에서도 입헌군주 가능성을 탐색했고, 또 초기의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경험도 듣고 그 실상을 간파했다. 이 모든 지식과 정보는 선생이 당시 선진사상에 심취한 젊은이들의 생각을 포용하는 넉넉한 가슴 때문에 가능했다. 북경에 있는 선생의 거처에는 국내에서 망명하는 패기 넘친 젊은이, 일찍이 시대의 변화를 예감한 세계 곳곳에서 몰려드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유석현(錦山 劉錫鉉)선생의 말대로 “우당집에 밥 얻어먹지 않는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우당의 많은 재산도 이런 나날을 보내느라 모두 탕진 되었고 말년에는 궁핍한 생활을 한 것도 모두 이에 기인한다.  

 


선생은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동지들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면서 또 한편으로  무엇이 과연 새로운 조국건설에 방도인가를 고민하셨다. 그러나 당시 국제적인 환경과 일본의 대륙침략으로 인한 중국의 형세는 날로 불리하게 돌아갔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중국 전역을 침략하는 압도적인 형세였다. 그럼에도 항일전선에서는 좌우대립이 심각했다. 김좌진장군도 그러한 대립 속에 희생되셨다. 그뿐인가 선생의 아우인 호영(頀榮)일가도 몰살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제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일본 제국주의가 광대한 중국 전역을 침략한다면 반드시 그 근거지에 허점이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 또 만주에 있던 젊은이들, 선생이 일생을 걸고 길렀던 동지들도 선생의 마지막 기대였다. 선생은 만주에서 지리멸렬의 위기에 빠진 항일투쟁 전선을 정비하고 좌우대립을 해소하고 기지를 다시 세워서 본격적인 일본의 배후를 공략하는 구상을 세웠다. 1932년은 일제의 침략강도가 더욱 높아졌으나 이에 대항하여 싸우는 젊은이들의 피는 한층 끓었다. 4월29일 일본의 천장절(天長節) 기념식날 청년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제의 고관, 장군들을 일거에 날려 보냈다. 중국인들도 감히 못한 쾌거였다. 이를 목도한 선생은 일제에 대항하여 마지막 여생을 받침으로써 정세를 역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해의 젊은 동지들은 극구 만류했다. 노인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다는 것은 무리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마지막 날 선생은 결심을 밝혔다. “내가 일생을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보내어 희생시켰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그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다. 이제 내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이제 남은 것은 동지들에게 이 늙은이도 항일전선에서 끝까지 싸웠다고 알리고 싶다. 나의 이 결심을 막지 말아 달라. 그리고 오랫동안 현지의 동지들과 비밀리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이렇게 말하고 동지들과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동지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선생은 인자한 미소를 진 모습이었다. 허름한 중국옷(그 옷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으로 가장한 선생은 비밀리에 상해부두에서 배를 타셨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때 상해 동지들 사이에 일본 밀정 스파이가 잠입해 숨어있는 것을.....일본은 선생을 검거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련항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의 헌병, 경찰 그리고 그들의 지휘를 받은 중국 수상경찰들이 삼엄한 경비 속에서 배에 뒤 칸에 숨어계신 선생을 포위하고 즉각 연행했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당시 선생을 맞이하기 위해 동지들이 대련항에 은밀하게 영접 나갔다가 그들도 대부분 검거되었다. 모진 고문이 시작되었다. 만주지역의 동지들의 조직, 임무, 활동상황을 알기위해 그들은 몸 달았다. 고문의 도는 점점 심해진 것은 명약관화했다. 드디어 노인 우당선생은 숨을 거두셨다. 그들은 연락을 받고 시신을 찾으러 간 유가족에게 선생이 자결하였다고 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참고 :
이글은 99년 6월 30일 우당장학회 99년상반기 업무보고에서 수원대학교 사학과 박환교수가 발표한 내용, 2001년 11월 17일 이덕일박사의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의 강연 내용, 2003년 11월 17일 중국 매화구시(梅花口區) 조선민족교육사 총재 김홍범(金弘範)선생의 “중국에서의 우당선생의 독립운동과 한민족교육”에서 발표한 내용들을 종합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