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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기형 선생 저 山下丹心
작성자   
woodang
[ 2005-03-24 17:18:15 ]    
부귀영화도 목숨도 다 바쳤다. [1994.11.]

 

부귀영화도 목숨도 다 바쳤다. [1994.11.]
- 友堂 李會榮의 망국한 서린 피맺힌 최후  


우당 이회영은 고종 때 이조판서 이유승의 넷째 아들, 고종이 주는 벼슬을 고사했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사양함이 마땅한 줄 아뢰오.” 오로지 야인으로 보황(保皇) 구국에만 헌신 세인으로부터 “백두재상”이라는 별칭도 얻은 무욕고결파.

이상설, 이동녕, 전덕기 등과 독립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경술국치 망국 비운에 맞닥뜨리자 특권도, 명예도, 행복도, 재산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자기의 가산은 물론 영의정 家로 양자간 중형 석영의 가산마저 모조리 팔아 챙겨 가지고 동생 시영과 모든 권솔을 이끌고 북만주로 떠났다.

서간도 합니하(哈泥河)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손수 황무지를 일구며 일제에 항거한 준비를 했다. 우당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조국 독립운동에 활용했다. 국내, 만주, 중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쥐락펼력 이상설, 이동녕, 신채호, 김창숙, 김좌진 등과 연락 상해 임정수립과 조국광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袁世凱, 李石曾, 魯迅, 陳偉光(이상 중국인), 에로셍코(러시아 인), 范本梁(대만인) 등과 사상문제와 독립 문제를 토론 우당의 영향력은 당시 상해 임정요인을 합친 힘보다도 더 컸다. 일제는 거물 이회영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날뛰었다.

1932년 11월 초 배로 북만행 중 대련 앞바다에서 변절자의 밀고로 잡혔다. 대련경찰서 형사대와 광동군 헌병들은 회유, 협박, 구타, 잠 안 재우기, 갖가지 고문을 번갈아 들어댔지만 상대는 구국의 바위산 요지부동 사람 잡아 늑대심문도 허사였다. 우당은 순국을 각오 유황불 고통을 참고 늠름한 기개로 맞섰다.  

형사1 : 독립, 선인(鮮人) 조선사람들 멸시하여 부르는 말들이 독립할 힘이 있나?  
우당  : 힘! 있다 뿐인고, 5천년 문화민족이다.
형사2 : 무정부주의란 것도 결국은 독립운동이지?
우당  : 모른다.
형사3 : 신흥무관학교 전모를 밝혀라  .
우당  : 모른다.
헌병  : 상해임시정부에 준 군자금 액수는?
우당  : 모른다.
형사1 : 국내에서 접촉한 인사는 누구누구냐?
우당  : 모른다.
형사4 : 만주와 지나(支那) 支那란 중국을 낮추어 한 말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와 사상가의 이름을 대라
우당  : 모른다.

우당은 어혈이 낭자 얼굴은 퉁퉁 붓고, 온몸은 피멍이 들어, 앉을 수도 길 수도 없었다. 살인 심문 십여 일째 우당의 검은 눈동자는 반쯤 돌아갔고 몸은 물 묻은 솜 마냥 가누질 못했다. 기력도 체력도 탈진, 소진 1932년 11월 17일 한 시대의 선각자, 거성, 일세의 열혈 애국 독립지사는 드디어 거룩한 숨을 거두었다니 순국 고절의 나이 아아 향년 예순 다섯.

천인공노할 일제 악귀들은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우당의 시신을 일찌감치 화장해버렸것다. 역사여 기록해 둘지어다.
 

이기형 선생 저 山下丹心 [2001년 12월 21일] 65-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