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자료실

 

 

 

 

 

 

 

제목   
100년 편지 323_그 모든 재산 조국에 바치고~
작성자   
woodang
[ 2019-03-25 13:28:51 ]    
그 모든 재산 조국에 바치고 귀천, 영석(潁石) 이석영 할아버지께
-이종찬-

언젠가 저는 국사편찬위원회가 2009년에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35권 ‘한국국민당 I’ 편을 펼쳐본 일이 있습니다. 195쪽에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랄 만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1936년 5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된 <한민> 제3호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이었습니다.

그 글은 ‘이 부인의 별세’란 제목 아래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고 이석영(李石榮)의 부인께서 상해에 있는 그의 조카 이규홍(李圭鴻)의 댁에 의탁하여 계시다가 노환으로 인하여 본월 11일에 불행히 별세하였는데, 향년 82세이시다. 그는 말년 구구한 신세로 지내시다가 종시 이역에서 돌아가셨으니 실로 유한이 많으셨으리라 한다.”

저는 한참 동안 그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기에 저의 둘째 할아버지이신 영석(潁石) 옹의 할머니는 두 분이셨습니다. 먼저 할머니는 정씨 할머니로, 시집오신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고, 그 뒤에 기사에 소개된 할머니께서 시집오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 댁은 떵떵거리는 장안의 갑부였습니다. 새색시로 시집온 할머니를 얼마나 부러워들 했겠습니까?

이석영

영석 이석영 할아버지는 1880년에 당시 ‘가오실 대감’으로 불리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영의정 댁에 양자로 가셨습니다. 그 댁의 재산은 <매천야록>에 보면 “양주(楊州) 가오곡(嘉梧谷)에 별장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80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 그가 왕래하는 80여 리가 다 그의 밭둑길로 다른 사람의 땅은 조금도 밟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땅을 차지했기에 이렇게 과장된 표현이 나왔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게다가 가오실 대감은 양자를 맞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으니, 둘째 할아버지로서는 뜻하지 않게 그 재산을 물려받는 상황이 된 겁니다. 속된 말로 할아버지 6형제는 이 둘째 할아버지 덕분에 호강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잘 알다시피 그 무렵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이 땅에 눈독을 들이고 넘보던 때였습니다.

이런 백척간두 상황에서 영석 할아버지가 하신 일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서울 회현동 집 앞의 정자 ‘홍엽정(紅葉亭)’을 아우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과 그 친구들에게 내주고, 여기서 새로운 서양문물을 공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신학문을 익히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 모두 그 후 독립운동에 주역이 되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기울어진 나라가 일제의 먹잇감이 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습니다. 6형제의 친아버지이신 이유승(李裕承, 1835~1906) 공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노구를 추슬러서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을사늑약이 폐하의 재가를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의정대신 대리로 임용한 것이 부당한 인사이니 그를 당장 처단하라는 상소였습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 6형제는 항일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형제들을 단결시키는 일은 단연 영석 할아버지 몫이었습니다. 당신의 재력으로 동지들을 끌어모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항일계몽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등등해졌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면서, 한국은 이제 보호국에서 병합국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제 더이상 국내에 머물면서 항일운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일을 벌이는 것은 언제나 넷째 우당 할아버지였고, 그 뒷받침은 둘째 영석 할아버지, 그리고 뒷수습은 다섯째 성재 할아버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제간에 역할 분담도 이뤄졌습니다.

우당 할아버지는 영석 할아버지께 의견을 냈습니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형님 재산을 그대로 두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마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에도 운명이 있다면 나라를 위해 투자하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말에 영석 할아버지는 선뜻 나섰습니다.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남양주에서 서울 오는 80리 길의 그 드넓은 본인 소유 토지를 일본 식민 당국의 눈에 띄지 않게 싸게 방매했다고 합니다. 그때 방매한 재산을 누군가 1969년도 쌀값과 소값 구매력으로 환산해보니 600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값으로는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돈을 감춰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따뜻한 보료 깔고 아랫목에 앉아 양반 노릇 충분히 할 수 있는 분들이 이를 포기하고 엄동설한에 떨면서 압록강 건너 낯선 땅에 가서 집 짓고, 병사들 막사 마련하고, 식량 사들이고, 젊은 장교들 훈련시키는 데 투자하는 그 넓은 마음…. 이게 영석 할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기개였습니다.

영석 할아버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들 두 형제가 모두 희생되어 절손(絶孫)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몇 해는 상하이의 롱당(弄堂, 주택가 골목길) 안에 자리 잡은 골방에서 콜록콜록 기침을 삼키며 조카들이 끓여드리는 거친 식사로 끼니 때우며 외롭게 살다 가셨습니다.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죽으면 저 사람이 걱정이야” 하며 할머니 걱정만 하셨습니다. 영석 할아버지가 그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버리신 뒤 할머니는 조카댁에 얹혀서 2년 더 사시다 앞에 소개한 대로 별세하셨습니다. 아마도 영석 할아버지는 당신과 할머니의 말년의 삶에 대해서도 “혁명가가 가는 길은 이런 거야!”라고 하시겠습니까?

할아버지 내외분은 상하이의 정안사로(靜安寺路)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들었습니다. 1992년 제가 다시 상하이에 갔을 때 그곳은 이름이 바뀌어 송경령공묘(宋慶齡公墓)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박은식, 노백린 선생의 묘비는 있는데 이석영 할아버지의 묘비는 없었습니다. 상하이 공동묘지에는 A․B․C 등급이 있는데 C급은 3년이면 이장하든가 화장하여 골분을 가져가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족이 챙기지 않으면 관리자가 화장해버린다고 하고요.

그렇게 보면 영석 할아버지 내외분은 80리 길의 넓은 땅이 아니라 80cm의 공간조차 이 땅에 마련하지 못해 하늘로 귀천(歸天)하셨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귀천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에 바친 영석 할아버지의 삶에 더욱 걸맞은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석 할아버지 내외분께서 부디 영면하셨기를 바랄 뿐입니다.
--------------------------------------------------------------------

*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망국을 당하자 형제들과 함께 구국을 맹세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영의정까지 오른 양부(養父) 이유원(李裕元)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전부 처분해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운영자금으로 바쳤다. 장남 이규준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29세로 병사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종 찬
1936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경기고등학교와 육사(16기)를 졸업했다. 4선 의원. ‘국민의 정부’ 출범의 주역이며, 대통령직인수위원장과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당기념관장, 우당장학회 이사장으로 독립정신 선양에 힘썼고, 현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다.